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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에 포르투갈인들이 도착한 시기 꾸리찌바 고원지대는 제 (Jê) 뚜삐 과라니 (Tupi-Guarani)언어를 사용하는 인디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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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 초반기는 브라질 남쪽과 남동쪽 고원지대에 거주하던 인디언들과 유럽인들 사이의 전쟁이 시작된 시기로 기록되며 전쟁을 벌이던 이들은 인디언을 노예로 만들고 금속과 보석을 채굴 하려던 포르투갈, 스페인 원정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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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 초반기는 브라질 남쪽과 남동쪽 고원지대에 거주하던 인디언들과 유럽인들 사이의 전쟁이 시작된 시기로 기록되며 전쟁을 벌이던 이들은 인디언을 노예로 만들고 금속과 보석을 채굴 하려던 포르투갈, 스페인 원정대였다.  

    꾸리찌바 (Curitiba) 1531년 뻬로 로보 (Pero Lobo) 원정대로부터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잉카 (Incas)지역의 금과 은을 채굴하기 위해 까나네이아 (Cananéia)에서 출발한 이 개척자 원정대는 오늘날 뽄따 그로사 (Ponta Grossa)도시 주변의 인디언 오솔길을 따라 갔으며 이 원정대는 포스 도 이과쑤 (Foz do Iguaçu)가까운 곳에서 빠라나 (rio Paraná)강을 건너던 중 과라니 인디언들로부터 한 명씩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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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 중반 꾸리찌바 (Curitiba) 평야에 금광이 있다는 정보가 처음으로 들리기 시작하며 많은 금을 찾는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1649
    년 남 해안(Costa do Sul) 전쟁의 작은 배들의 지휘관 이었던 에바노 뻬레이라 (Ébano Pereira)는 금을 찾아 강을 거슬러 올라 고원지대에 도착하기 위해 노싸 세뇨라 도 호자리오 데 빠라나과 (Vila de Nossa Senhora do Rosário de Paranaguá)마을에서 탐험 원정대원을 모집하여 지휘했다.
    처음 이들은 아뚜바 (Atuba) 강 왼쪽과 오늘날의 뻬르네따 (Vila Perneta)
    , 알또 (Bairro Alto) 사이에 자리했으며 후 에는 오늘날 꾸리찌바 (Curitiba)중심지인 이보 (rio Ivo) 강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1668
    년 이 마을에 뻴로우리뇨 (pelourinho 사형대 종류)설치가 허가되며 촌락의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뻴로우리뇨 (pelourinho)는 대중 광장에 세워진 쇠 테두리가 달린 나무 기둥으로 죄인들을 처발하는데 사용되는 것으로 당시 법적으로 촌락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필요했다.

    1693
    3 29일 첫 선거가 치루어지며 노싸 세뇨라 다 루즈 도스 삐냐이스 (Vila de Nossa Senhora da Luz dos Pinhais)촌락으로 자리하게 되었으며 1701년 주민 1,400명으로 꾸리찌바 (Vila de Curitiba)촌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06년부터 1693 3 29일은 꾸리찌바 (Curitiba)창립일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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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 초반 히오 그란지 도 술 (Rio Grande do Sul)에서부터 상파울로 저지대와 미나스 제라이스 (Minas Gerais)평야까지 가축이 이동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이 길이 지나가던 꾸리찌바 (Curitiba)는 지역 상업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꾸리찌바 (Curitiba) ultrapassou 빠라나과 (Paranaguá)보다 더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하게 되며 1812년 관할구역 (Comarca)본부로 지정되었다.

    1842
    년 촌락은 도시 급으로 상승하게 되었으며 당시 빠라나 (Paraná)는 상파울로 (São Paulo)의 관할구역이었다. 1853 12 19일 빠라나 (Paraná)관구에서 자치권을 획득하며 1854 7 6일 꾸리찌바 (Curitiba) 5.819명 인구를 가진 관구의 수도로 자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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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부터 꾸리찌바 (Curitiba)는 유럽과 아시아의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며 도시의 다양한 부분이 변화되었다.